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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이야기

내가 겪은 타이포그래피—현재

전공은 한글 디자인, 한글 활자 디자이너라고 소개합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13년 차 교수입니다. 학생들에게 한글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992년 가을에 처음 한글을 그려봤으니까, 내년 여름을 지내면 30년 동안 글자를 그린 게 되네요. 그리고 저를 한 단어로 소개한다면, 아마도 ‘세로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매년, 몇 글자라도 새로운 글자체를 그리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제가 그린 글자체는 ‘천명’입니다. 예상하시겠지만 ‘지천명 知天命’의 ‘천명’입니다. 50살이 된 저를 위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제가 ‘하늘의 뜻을 알지’는 못하니까 ‘知’를 빼고 ‘天命’이라고 이름했습니다. 평소에 글자체와 저를 연관 짓기 꺼렸는데, 올해는 무슨 마음인지 저를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천명(2021)

‘천명’을 간단히 소개하면, 1969년 출판된 ‘한글 한자 펜글씨 모범 교본’(홍석현 엮음. 삼진출판사)에 있는 글씨체를 보고 그렸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옛 한글 글자체를 수집했고, 구한 책 중에 펜글씨 교본도 여러 권 있었습니다. 보통 펜글씨의 구조와 공간, 균형과 비례 등은 궁서체와 거의 같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로쓰기를 중심으로 세로쓰기를 조금 보여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천명의 모태가 된 글씨는 정형화된 궁체가 아닌 일상의 글씨로, 글씨를 많이 쓴 사람 ‘달필’의 글씨였습니다. 책 내용도 한글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으며, 정자와 흘림 글씨를 연습시키고, 세로로 이어쓰기까지 예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글씨체는 비슷하지만 문장방향에 따라서 무게중심과 낱글자의 덩이 감이 달랐습니다.


한글 한자 펜글씨 모범 교본의 세로쓰기와 가로쓰기


사실, 이처럼 서로 다른 양식의 한글 글자체가 한 책에 있는 모습은 2014년 쯤, 제가 좋아하고 따르던 선생님(지금은 돌아가신)께서 주셨던 책(백련초해 필사본(영인본))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 책에서 한글은 한자와 함께 쓸 때, 한글만 쓸 때가 달랐습니다. ‘아! 이럴 수 있겠구나’ 놀랐습니다. 하지만 막연히 한자를 쓰던 사람이고 글씨를 많이 쓴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옛날 사람이니까 가능하다고 아무런 의심 없이 단정 지었던 것입니다.
백련초해 필사본

선생님께서 주신 책을 봤을 때, 저는 세로쓰기에 몰입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련초해 속 한글을 보면서, 특히 한자와 함께 썼던 한글을 보면서 오래전 제가 부정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최정호 선생님이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글자체에 대한 말씀을 글로 읽었는데, 저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둘을 만족한다는 것은 둘 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을 반성하면서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모두 할 수 있는 글자체 디자인을 시도했고, ‘생명’과 ‘존재’ 등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양방향이 가능한 글자 구조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직접 글씨를 써보면서 둘의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볼 엄두는 내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글씨를 못 쓴다고 또 단정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글 한자 펜글씨 모범 교본’을 보고 나서, 연습하면 쓸 수도 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비록 제가 원하는 만큼 글씨를 잘 쓸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서는 달필이 되어 글씨를 쓰고, 글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천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절대적이던 세로쓰기였지만, 이제는 가로쓰기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존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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