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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이야기

꽃길을 놓다

세로쓰기용 활자 개발을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그 과정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오랜 문화가 어쩌다 이렇게 남의 것처럼 낯설어졌는지... 남아있는 옛 문화의 흔적을 뒤적이며, 지금 시대로 가져올 세로쓰기 글자체의 미감을 찾아 헤맸습니다.



세로쓰기에 적합한 본문용 활자를 디자인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모습이 적합할까 고심했습니다. 세로쓰기하던 때에 썼던 글자체는 판본체와 궁체가 있고 최근까지 세로로 썼던 신문용 활자가 남아 있어서 그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본문용 활자에 관해서는 그동안 몇몇 연구자가 그 속성(조건)을 하나씩 밝혀내 주어서 이해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세로쓰기로 된 책을 보기도 했고, 커서는 세로쓰기를 하던 시기의 글자체 특징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세로쓰기용 글자의 균형감을 다룰 만큼 잘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최근까지 본문을 세로로 조판했던 신문용 활자를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신문용 활자는 네모틀에 꽉 차게 그려서 가로로 쓰나 세로로 쓰나 글줄이 가지런한 특징이 있습니다) 저는 신문명조의 구조를 바탕으로 꽃길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4개월 정도 작업을 진행했을 무렵,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용 활자는 매체 환경에 맞춰 만들어진 좋은 활자지만 도서(책) 본문에 적합하지는 않다는 실험과 평가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더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어 두 달 정도 작업을 멈췄습니다. 처음 그렸던 꽃길. 신문활자의 구조를 바탕으로 그렸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 것이 궁체와 문화부 쓰기 정체였습니다. 궁체는 글자의 무게 중심축이 가로모임꼴의 기둥 ‘ㅣ’에 맞춰져 있어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글자체 중 세로 글줄이 가장 선명합니다. 그리고 문화부 쓰기 정체는 기본적으로 궁체와 같은 구조지만 붓이 아닌 펜으로 쓴 글자체여서, 글자의 뼈대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글자체에서 원하는 모든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세로쓰기용 글자체의 구조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 궁체와 펜글씨를 바탕으로 다시 4개월 동안 처음과 다른 글자체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글자의 구조는 마음에 드는데, 표정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습니다.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본문용 활자의 인상과 다르게 너무나 가녀려 보였습니다. 그래서 또 2개월 정도 쉬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은 아예 잊고 지냈습니다. 다시 그린 꽃길. 글자의 무게중심과 글줄흐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그대로 보인다. 부끄럽다.

그 뒤에 글자체에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없애려고, 획의 굵기를 통일하고 꺾임과 휨, 맺음의 형태를 단순화했습니다. 이렇게 고치고 고쳐서 짧은 문장을 만드는 데에 12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무렵 저는 안상수, 한재준 선생님과 함께 아모레퍼시픽의 전용 서체인 ‘아리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리따’ 디자인 회의를 하던 날, 세로쓰기용으로 만든 세 가지 글자체를 보여드렸는데, 두 분 모두 세 번째 글자체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방향을 결정하고 꽃길을 모두 그렸습니다.
꽃길을 발표할 무렵 이런 메모를 많이 남겼었다. 그리고 글줄 길이가 굉장히 짧은데, 이 때는 나 스스로 세로로 길게 쓰는 것이 어색했다.

꽃길을 발표할 때, 꽃길을 사용해서 《리진시선》(황현산편)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로쓰기에 맞는 문장부호와 숫자를 그려야 했습니다. 당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를 조사하면서, 그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게 됐습니다. 저는 한글에 어울리는 문장부호가 따로 있을까 생각하면서, 고리점 대신 온점을 쓰고 모점은 그대로 썼습니다. 그리고 2006년 5월에 ‘꽃길’을 선보였습니다. 《리진시선》 중에서. 문장부호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2009), “‘꽃길’을 놓다” 중에서)—

‘꽃길’을 발표한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꽃길을 발표한 뒤에는 다시 세로쓰기용 활자를 그릴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뒤로 계속 세로쓰기용 글자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공한체 같은 가로쓰기용 활자도 가지런한 글줄흐름이 나타나지만, 세로쓰기용 활자와 같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절대적이었고 당연했던 가로쓰기가 이제 더는 좋아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음 글은 꽃길을 그리기 훨씬 전, 가로쓰기에 몰입해 있던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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