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큰 전환점이 된 꽃길을 그리기 전까지 저에게 가로쓰기 그리고 탈네모꼴 한글은 절대적인 이상이었습니다. 가로쓰기 세대이기 때문에 문장방향에 대한 특별한 의심 없이 당연하게 생각했고, 탈네모꼴 한글이 한글 활자의 미래라는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가로쓰기에서 글줄흐름선처럼 해결해야 하는 부분 역시 탈네모꼴이 가진 다양한 장점들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랫글은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세미콜론, 2009)에 썼던, “‘탈네모꼴, 한글이 완성되다”의 일부입니다.
네모틀 속에 한글
한글은 초성·중성·종성의 소리값에 해당하는 글자가 있으며, 초성·중성·종성을 가로나 세로로 또는 세로+가로로 모아쓴다. 이에 따라 글자를 만들면 한글은 네모꼴이 아닌 세벌식 탈네모꼴이 된다. 『훈민정음』 어디에도 한글을 한자처럼 네모꼴에 맞추어 쓰라는 설명이 없으나 창제 초기에 만들어진 책을 보면 한글은 한자와 같이 글자가 정사각형 안에 놓여 있는 네모꼴 글자이다.(어떤 사람은 『훈민정음』에 예시된 글자가 탈네모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받침이 있고 없음에 따라 글자의 크기가 미세하게 다른 것은 지금의 탈네모꼴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 한글은 네모꼴로 모아 썼을까? 한자와 한글의 구조를 비교해 보자. 한자 ‘卽’, ‘匙’, ‘北’, ‘眞’ 등에 쓰인 ‘匕’는 글자에 따라 크기와 비례가 달라지면서 네모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한글 역시 ‘가’, ‘고’, ‘과’, ‘각’, ‘곡’, ‘곽’ 등에 쓰인 닿자 ‘ᄀ’과 받침 ‘ᄀ’은 모임꼴(위치)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변하면서 네모꼴을 이룬다. 이러한 유사성은 한글이 한자의 영향을 받아 탈네모꼴이 아닌 네모꼴이 된 단서라고 볼 수 있다. 한글은 탈네모꼴로 태어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고 우리는 58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탈네모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탈네모꼴은 70여 년 전에 세벌식 타자기가 만들어지면서 나타났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거부감만 주었을 뿐 지금처럼 탈네모꼴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단지 기계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용한다는 반응이었다. 세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던 공병우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한글 기계화 과정에서 탈네모꼴 글자의 장점을 알게 되었다. 탈네모꼴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한글 기계화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네모꼴 글자인 명조체(바탕체)와 고딕체(돋움체)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리고 탈네모꼴은 한글 활자디자인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공병우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네모꼴 활자의 문제점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네모꼴 활자는 기계에서 처리속도가 늦고 디자인하기도 힘들어 경제적이지 못하다. 둘째, 간단한 구조의 글자와 복잡한 구조의 글자가 같은 공간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지 않다. 셋째, 한글 창제원리에 맞지 않으며 한글의 구조와 글자꼴의 모습이 달라서 한글 교육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외에도 현재 가로쓰기 방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등이 지적되었다.
반면 탈네모꼴의 장점으로는 한글의 특징이 살아 있다, 창조성을 살려준다, 교육에 효과적이다, 가독성이 좋다, 글자꼴 개발이 활발해진다, 경제적이다, 산업화에 뛰어나다, 시각문화를 다양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기능적이다, 기계화가 용이하다 등이 강조되고 있다. 단, 이 장점은 세벌식 탈네모꼴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고, 세벌식 탈네모꼴과 네모꼴의 중간 단계에 있는 탈네모꼴의 경우, 위에 열거한 장점 중 일부는 해당하지 않는다. 네모꼴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들 역시 공간 배분의 이론에 근거한 문제 제기로 아직 검증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탈네모꼴이 활자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 관한 연구가 계속 되고 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여태껏 ‘가로쓰기’를 주제로 글을 쓴 적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왜 그랬는지 잠깐 생각해보니까, 당시에는 ‘가로쓰기’만 알던 때였고, 저의 선생님들이 가로쓰기에 대한 글을 쓰셨기 때문에 제가 따로 가로쓰기에 관한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몇 편 더 올릴 가로쓰기에 관한 글 역시 가로쓰기를 의식하며 쓴 글이라기보다, 가로쓰기는 ‘당연한’ 전제였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