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같은 폰트를 만들고 싶어요.
활자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고 오는 사람 중 몇몇은 어떤 특정한 폰트를 보고 ‘나도 저런 폰트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잘 그린 멋있는 폰트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아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따라 그리면 안 됩니다.
먼저 ‘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폰트(프로그램)를 창작물로 보고 보호할 뿐이지, 글자꼴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린 글자꼴을 똑같이 베낀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단지 남의 것을 베껴서 ‘판매’했을 때 공정거래법에 따라 제지를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남의 글자체를 베끼는 ‘행위’까지는 현재 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남의 글자꼴을 베끼면 온라인에서 ‘난리’가 납니다. 제가 가까이서 본 것만 두 건이 있습니다. 난리 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고 해도, 베낀 사람에게는 활자디자인 바닥에서 좋지 않은 평가가 따라다닙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창작활동을 할 것이라면 남의 글자꼴을 베끼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가끔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 어디 있냐고, 많은 글자꼴이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항변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이런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활자 디자인의 역사를 보면, 특히 본문용 활자체를 보면 그런 주장이 꽤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용 활자체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 때문에,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보통 이전 시대의 본문용 활자체 구조 안에서 새로운 활자 주조 기술이나 인쇄 기술 등에 맞춰서 다시 그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목용 활자체 역시 기존의 활자체에 다른 표현을 입혀서 모습(인상)을 바꾸는 식으로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다른 나라 이야기지만, 디자이너에게 널리 알려진 디도나 보도니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바스커빌의 글자체 영향을 받은 페르맹 디도는 획에서 필기도구의 흔적을 지우고, 발달한 활자주조 기술을 이용해 극단적으로 가는 획을 가진 글자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암바티스타 보도니는 디도의 영향을 받아서 보도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글자꼴의 유사성에 대한 판단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보도니가 디도를 베꼈다고 생각하나요? 실제로 두 글자체는 구조가 다르지만, 적어도 보도니는 디도의 표현을 도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활자디자인 분야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창작과 도용은 결국 창작자의 태도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보도니가 디도에서 받은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또 자신이 고유하게 만든(디자인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혔다면, 저는 이를 도용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남의 글자꼴과 비슷하게 그려 놓고서, 난 그것을 본 적 없다고 잡아뗀다면, 이것은 직업윤리의 문제를 넘어서 인성의 문제로 보입니다. 세상에 없었던 것을 창작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자칫 남의 것을 도용하는 결과를 낼 수 있음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