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활자를 디자인하고 싶습니다. 무엇부터 시작하죠?
‘좋은’ 활자를 디자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면, 글자를 스케치하기 전에 ‘쓰임’과 ‘인상’을 생각해보세요. 활자디자인은 수천 자를 그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목표와 계획 없이 수천 자를 무작정 그리면, 그때그때 마음 가는 방향으로 글자를 그리게 되고, 그러면 글자 형태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많은 시간 동안 애써 만든 폰트가 쓸모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과 인상. 좀 낯설기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목표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과정입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폰트를 다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우선 누구에게 폰트를 써보라고 말해 볼까요?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는 편집디자이너? 아니면 그래픽디자이너? 웹이나 모바일 등의 UI디자이너? 브랜딩 회사의 디자이너? 이 외에도 폰트를 쓰는 디자이너는 많겠죠? 수많은 분야에서 디자이너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폰트를 쓰는 모습을 크게 나눠보면, 종이 등에 글자를 인쇄하거나 컴퓨터 화면 등에 글자를 출력(표시)합니다. 그런데 이 두 매체는 같은 글자체를 써도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활자를 디자인할 때에는 적어도 어떤 매체에서 쓸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자, 이제 폰트를 써보라고 제안하는 모습을 상상해볼게요. 본문 또는 제목, 어떤 용도로 쓰라고 말할까요? 몇 글자를 쓰거나 한두 문장에 쓰길 바라나요, 아니면 책과 같이 많은 글에 쓰이기를 바라나요? 낱말처럼 몇 글자를 쓸 때는 보통 글자를 크게 쓰고 많은 글에 쓸 때는 작게 쓰이곤 합니다. 글자를 크게 쓸 때는 보통 개성이 잘 드러나야 할 일이 많고, 작게 쓸 때에는 편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활자를 그릴 때 어떤 상황에서 쓸 것인지 정하면, 얻고 싶은 결과(폰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누가 보는 디자인에 쓰라고 말할까요? 아이가 보기에 적합한 글자체인가요? 성인이 보기에 적합한 글자체인가요? 혹시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편안한 글자체인가요? 같은 글자체라도 나이와 시력 등에 따라서 편안히 읽을 수도 있고, 불편하거나 못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잘 보인다고 해서 모두 글자가 잘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활자의 ‘쓰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번엔, 어떤 내용(분위기)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수한 내용에 어울리나요? 강골한 내용에 어울리나요? 아니면 기괴한 내용에 어울리나요? 글자 획이 가늘면 밝고, 두꺼우면 묵직하겠죠. 직선이 많으면 차갑거나 예민하게 보일 것이고, 곡선이 많으면 부드럽고 따듯해 보이기 쉬울 것입니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에 따라서 글자체가 뿜어내는 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내용에 어울리기 원하는지 먼저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활자의 ‘인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활자의 ‘쓰임’과 ‘인상’ 별것 아닙니다.
그냥 많은 상상을 해보세요. 가능한 구체적으로. 글자를 스케치하기 이전에 좋은 폰트를 만들기 위한 준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