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잉크를 아끼는 글자’를 디자인한 배경.
창작자는 누구나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런데 막연히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한글디자인이나, 활자디자인을 하면서 늘 새롭고 멋있는, 그리고 잘 팔리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된 적은 없는 듯합니다. 특히 서른 살이 훌쩍 넘어서까지 ‘디자인’ 능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지내던 2006년, 저에게 조금 뜻밖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한 출판사에서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는데, 저를 ‘창의적인 프로세스’라는 꼭지에 디자이너로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절판’된 상태이지만, 그 책은 ‘현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자질’, ‘일자리 구하기’ 등 디자이너가 ‘잘’ 살아남기 위한 조언과 경험을 담고 있는데, 번역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추가해서 내는 계획이었습니다.
저는 조금 의아해했습니다. ‘왜 나를’. 인터뷰 요청을 받고 나는 창의적이지 않다고 말했지만 활자디자인이 척박한 우리나라 시장에서 ‘활자디자이너’로 살아내고 있는 것만으로 ‘창의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창의적’인 이유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활자디자이너로서의 고민과 앞으로 하고 싶은 디자인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잉크를 아끼는 글자’에 대한 생각을 밝혔습니다.
당시에 저는 새로운 본문용 폰트를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세로쓰기용 활자 ‘꽃길’을 끝냈고, 기업 전용서체라는 새로운 일인 ‘아리따’를 선생님들과 함께 열심히 디자인하고 있었습니다. 활자를 디자인해 본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끊임없이 출력을 합니다. 글자를 그리고 출력하고, 고치고 출력하고. 당시에 제 옆에는 이면지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 이면지를 보면서 제가 쓴 종이…, 나무 몇십 그루는 베어 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안함과 괴로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활자디자이너로서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린터 토너가 떨어져 글자에 흰 줄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마지널 존’이었습니다. ‘마지널 존’은 인쇄할 때 번짐 현상을 이용하여, 글자의 획 모양을 조정하는 방법입니다. 보통 글자의 줄기 끝에 날카로운 모양을 작게 그려서 글자가 또렷하게 보이게 하거나, 꺾임 안쪽을 살짝 파서 글자가 뭉치지 않게 만드는 것을 ‘마지널 존’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인쇄 기술은 상당히 진보되었지만, 여전히 인쇄의 특성과 종이의 특질로 인하여 미미할지라도 인쇄의 번짐 현상이 발생합니다.
문득, 잉크 번짐 효과를 이용해서 글자의 빈 공간을 메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잉크를 조금 덜 써도 글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빈 공간을 남겨 놓은 만큼 잉크를 아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잉크를 아끼는 글자’는 이미 너무 오래전 작업이지만, 지금도 저에게는 실천 방향입니다. 다행히, 나이가 든 탓인지, 이제는 ‘새로운’ 것에 집착하기보다 ‘필요한’ 것을 더 많이 생각합니다. 활자디자이너로서 교육자로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수행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고유한 ‘창작’은 그 순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주목받지 못했을지라도, 제가 그동안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작업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