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이 창제되었을 때 간결한 선으로 표현된 [훈민정음]체는, 썼다기보다 그렸다고 말하는 것이 그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럼 [훈민정음]체를 그리지 않고 썼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너무 오래전이라서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창제 당시의 한글 글씨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상원사중창권선문]체입니다. [대산어첩]체라고도 부릅니다. 문화재청에서 공식으로 사용하는 이름이 《평창 상원사 중창 권선문》이니까, [평창상원사중창권선문]체라고 해야 하지만, 저는 [상원사중창권선문]체라고 부르겠습니다.
《평창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세조가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를 다시 고쳐 세우는 신미대사에게 하사한 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인 한글이 현재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한글 글씨입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던 [월인석보]체만 해도 [창제초기]체처럼 그린 듯한 구조에 붓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홍무정운역훈]체는 획 순서와 운필이 보이지만 글자의 구조는 여전히 [창제초기]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원사중창권선문]체는 훈민정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편하게 쓴 글씨 같습니다.

[상원사중창권선문]체는 훈민정음 창제 때와 비슷하게 네모틀 안에서 좌우 균형이 잡혀있습니다. 네모틀을 가득 채웠던 [창제초기]체보다 밖공간이 여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넉넉한 속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자 해서체처럼 글자의 무게중심을 글자의 가운데 두었고, 힘 있는 획은 사방으로 뻗고 맺고 있어서 위엄이 느껴집니다.
낱자 [ㄷ]은 가로획을 먼저 길게 긋고 난 뒤에 그 아래 [ㄴ]을 붙여 쓰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때 모습과 같습니다. 또한 [상원사중창권선문]체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글씨에서 흔히 보이는 비대칭의 특징도 아직 크지 않은 것을 보면, 여전히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조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혹시 [상원사중창권선문]체를 보면서 어색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나요?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세로쓰기 글씨체인 [궁서]체와 [상원사중창권선문]체를 비교한다면, [상원사중창권선문]체가 좌우로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궁서]체는 모음글자 [ㅣ]를 중심으로 정렬해서 글자의 무게중심이 오른쪽에 물리적으로 가지런한 모습이지만, [상원사중창권선문]체는 물리적으로 가지런한 글줄흐름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로쓰기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지만, [상원사중창권선문]체가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원사중창권선문]체 역시 글자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시각적 글줄흐름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중 김충현의 궁서체
아직 한글 글자체 양식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서 양식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상원사중창권선문]체를 넓은 의미의 [궁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특정한 양식으로 자리 잡은 [궁서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한글 [해서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지난 일들을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누가 썼는지 모르는 《평창 상원사 중창 권선문》을 보면서 타임머신이 간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