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생활을 떠올리면, 술과 당구를 시작했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지만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은 평면조형과 입체조형 등 기초 조형 수업이 있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표현기법 수업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시각디자인과에 갔는데, 입시 미술학원에서 했던 조형연습과 무슨 중학교 공작 수업 같은 입체 조형을 만들었습니다. 기초가 중요하지만 정말 하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수업은 역시 표현기법! 그러나 표현기법 수업을 통해서 제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친구들이 공간에 형태를 배치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상상력이 신기했습니다. 또는 그림을 엄청나게 빠르게 그것도 잘 그리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도구를 놀라울 정도로 잘 다루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저는 무기력했습니다. 나름 잘 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커서, 저 자신에게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1학년 때 그린 새
1학년 때 그린 영화 [레인 맨]의 두 배우. 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의 인물 특징을 강조해서 그리라는 숙제
돌이켜 생각하면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부분은 보고 그릴 때, 그것도 똑같이 그릴 때였습니다. 일명 정밀묘사. 억울하게도 저에게 ‘창의적’으로 형태를 해석하거나 공간을 연출하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점점 학교 수업은 재미없어서 안 나가거나, 잘하지 못해서 안 나가거나, 선생님이 내주시는 프로젝트(숙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나갔습니다. 그 시간에 기억에 없는 무엇을 했고, 아니면 낮부터 술을 마시거나 당구장에 갔습니다. 당연히 학사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2학기에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들으면서 한글을 디자인하고 폰트를 직접 제작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학점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수업에 빠지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타이포그래피 수업도 몇 번 빠졌던 기억입니다. 그렇게 한글디자인과 인연을 맺었지만, 여전히 학교생활은 엉망진창이었고, 2학년 1학기까지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고 군대에 갔습니다.
만약 지금의 이용제였다면, 그때처럼 괴롭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계속 그렸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운명’이 있고 운명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진다면, 그림 그리는 일은 제 운명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 자리에 ‘한글디자인’이 있었고, 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제 더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억지로 무엇을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기운이 나는 것은 확실하지만, 인정받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 어려서 느꼈기 때문입니다.